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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역사


선사 시대

1963년 산시성 시안시 란톈현(藍田縣) 궁왕링(公王嶺)에서 발견된 남전원인 (藍田人)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년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

1953년에 발견된 반파(半坡) 유적지의 발굴 과정에서 가옥 40여 채, 땅굴 200여 개, 아궁이 80여 개, 기둥 구멍 400여 개와 옹기 가마 6개와 고분 170여 개가 출토됐다. 반파유적지는 약 6000여 년 전 번영기의 모계 씨족사회의 생산과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국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촌락 유적지의 하나이다.


기원전 1046년~기원전 770년

서주(西周) 때 시안은 ‘풍호(豊鎬)’라고 불렸다. 풍호는 풍경(豊京)과 호경(鎬京)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문왕(文王) 희창(姬昌)은 현재 시안 서남쪽에 풍경을 건설했고 아들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풍수(灃水) 동쪽에 호경을 건설하라 명령했다. 호경은 정치의 중심, 풍경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으로 이 둘을 합쳐 종주(宗周)라고 불렀다. 무왕이 은상(殷商)을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건립한 후에 풍호를 수도로 정했는데 이때부터 시안의 도읍으로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83년~기원전 206년

기원전 383년 진 헌공(獻公)이 역양(櫟陽, 현 옌량구)을 건설해 수도를 옹(雍, 현 펑샹 남쪽)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기원전 350년 그의 아들이 효공(孝公)이 수도를 함양(咸陽)으로 옮겼다. 진시황(秦始皇)은 중국 역사상 최초 중앙집권제 다민족 정권인 진(秦)왕조를 건립했다.


기원전 206년~서기 8년

기원전 206년에 유방(劉邦)이 정권을 잡아 장안(현 시안시 서북쪽 외곽 한청(漢城))에 서한(西漢) 왕조를 건립했다. 유방은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향(長安響)의 이름을 따서 ‘장안’으로 정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태평스럽고 평안하다’라는 의미이다.


 

서기 581년~서기 618년

서기 582년 수문제(隋文帝)는 한(漢) 장안성(長安城) 동남쪽(현 시안성)에 새로운 수도인 대흥(大興)을 건설하라 명했다. 수 건국 초기에는 수도를 장안 옛 성으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전쟁을 겪어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수문제는 용수원(龍首原) 이북인 옛 장안성을 포기하고 용수원 이남 한 장안성 동남쪽에 새 수도 대흥성 건설했다.

 

서기 618년~서기904년

당(唐)나라는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수나라 대흥성을 장안성으로 개칭하면서 이를 증축 확장했다. 당 태종(太宗)은 정관(貞觀) 8년(서기 634년) 성 외곽 동북쪽 용수원에 대명궁(大明宮)을 축조했는데 그 후에 성벽, 성루와 흥경궁(興慶宮)등 건축물을 끊임없이 지었다. 궁성은 현 시안시와 완전히 일치하고 황궁은 시안시 명성벽(明城墻)과 일치한다. 당나라 소릉(昭陵), 건릉(乾陵) 등 제왕릉(帝王陵)은 대부분 현 센양(함양, 咸陽)시에 있다. 하지만 당나라 때 당십팔릉(唐十八陵)은 모두 경조부(京兆府)의 관할 구역에 있었고 건릉은 경조부(京兆府) 봉천현(奉天縣)에 있다.


서기 907년~서기1367년

당(唐)나라 이후인 지원(至元) 9년(서기 1272년) 원(元) 세조 쿠빌라이는 셋째 아들망갈라를 안서왕(安西王)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경조부(京兆府)를 안서로(安西路)로 개칭했다. 원황경(元皇慶) 원년(서기 1312년)에 안서로를 봉원로(奉元路)로 개칭했다.

 

서기 1369년

명홍무(明洪武) 2년(서기 1369년)에 봉원로(奉元路)를 서안부(西安府)로 개칭했다. 부성(府城)을 서안으로 줄여 쓰다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서기 1949년~현재

1949년 5월 20일 시안이 해방되었고, 그 후 중앙서북국(中央西北局)과 서북행정위원회(西北行政委員會)의 소재지와 중앙인민정부(中央人民政府)의 직할시(直轄市)가 되었다. 1954년 6월에 성(省) 직할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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